다마스쿠스 공방전
제2회 십자군의 전투 • 공방전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다마스쿠스 공방전은 제2차 십자군 운동 기간 중인 1148년 7월 25일 벌어졌으며 4일간 계속되어 7월 28일 끝났다. 이 공방전은 십자군의 결정적인 패배로 끝이 났으며, 십자군의 약화를 불러일으켰다. 교황 에우제니오 3세(Eugenius III)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Bernard of Clairvaux)는 십자군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이에 호응하여 독일의 콘라트 3세(Conrad III of Germany)와 프랑스의 루이 7세(Louis VII of France)가 이끄는 두 개의 기독교 군세가 성지로 향했다. 양 군은 한 달 동안 아나톨리아를 돌파하는 힘겨운 행군을 하였고, 그들의 군세는 거의 붕괴되었다. 십자군의 주된 목표는 에데사였으나,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3세(Baldwin III)와 성전 기사단은 다마스쿠스(Damascus)를 노리고 있었다.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의 유력자로 구성된 아크레 회의에서 십자군의 목표를 에데사에서 다마스쿠스로 바꾸었다.
다마스쿠스 공방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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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십자군의 일부 | |||||||
에데사로 진군하려는 십자군(오른쪽 지도를 봄. c.1140년)은 예루살렘의 보두앵 3세의 회유로 다마스쿠스로 향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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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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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예루살렘의 보두앵 3세 신성로마제국의 콘라트 3세 프랑스의 루이 7세 알자스의 티에리 |
무인 앗딘 우나르 사이프 앗딘 가지 1세 누르 앗딘 | ||||||
병력 | |||||||
50,000명 | 알 수 없음 | ||||||
피해 규모 | |||||||
알 수 없음 | 알 수 없음 |
십자군은 과수원이 있기 때문에 꾸준히 식량을 징발할 수 있는 서쪽으로부터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도시의 성벽 밖에 도착한 후, 십자군은 과수원의 나무를 이용하여 즉각적으로 공성전에 나섰다. 7월 27일, 십자군은 계획을 바꾸어 비록 식량과 물을 보급받기가 어렵지만, 방어도는 더 약한 동쪽 성벽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누르 앗 딘(Nur ad-Din)이 지휘하는 이슬람 원군이 도착하여, 십자군 부대와 그들이 보급을 받고 있던 서쪽의 과수원과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이 지역에 거점을 잡은 십자군들은 공성전을 계속하길 거부하였고, 세 명의 왕은 퇴각하는 것 이외에 별 방법이 없었다. 십자군 전군은 7월 28일 퇴각하였다.
각각의 십자군들은 다른 이들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이러한 상호불신은 패배로 인해 대대로 쌓여갔다. 십자군의 패배로 인해 다마스쿠스 시에서 십자군의 지원 세력은 사라졌고, 이에 따라 1154년 다마스쿠스는 공식적으로 누르 앗 딘의 손에 넘어갔다. 유럽에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는 이 결과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제2차 십자군과 자신과의 관계를 부정하려고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