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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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의 역사는 선사시대인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삼국시대에 미추홀이 있었다고 추정되며[1], 삼국 시대에 고구려의 영토가 된 뒤로는 매소홀현(買召䑸䎱)으로 불리다가 다시 신라의 영토가 되었고 경덕왕이 소성(邵城)이라 이름지었다.[2] 고려 시대에는 수도인 개성에 인접한 해안 지역으로서 해양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였으며, 왕성을 보호할 목적으로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오늘날 부평인 수주(樹洲)에 두었다. 안남도호부는 시흥, 양천, 통진, 김포, 그리고 원인천(原仁川)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소성현(邵城縣)이 속해 있었다.[3] 소성현은 고려 왕실의 외척을 배출하여 계속하여 지위가 격상되었는데, 고려 숙종대에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되었고, 인종대에는 인주(仁州)로, 공양왕 대에는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었다.[4] 그러나, 조선이 개국한 후 태조는 다시 인주로 격하하였고, 태종이 고을 사이의 서열을 정비하면서 인천으로 격하하여 오늘날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5]
세조 5년 인천에 도호부를 두었다.[6] 병자호란 이후 효종은 강화도로 들어가는 우회로를 확보하기 위해 제물진을 구축하였다.[7] 숙종 때에 이르러 제물진 앞 월미도에 행궁을 설치하고 방어를 강화하였다.[8]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운요호 사건을 거치면서 인천은 외세와 직접 대면하는 곳이 되었다. 제물포조약이후 6년이 지나 제물포가 개항되고 청나라와 일본의 조계지와 서양 여러나라의 영사관이 제물포에 들어서게 되었다.[9] 그리고 관교동(문학동)에 있던 인천의 중심지가 개항에 따라 사실상 제물포로 옮겨지게 되었다. 제물포를 통한 교역 대상국은 청나라가 압도적이었으나[10]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1906년 인천 내항을 축조하여 항구를 확장하였고[11],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인천은 일제 식민 통치의 중요한 항구가 되었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계속되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수산업단지의 역할을 하였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일본은 인천 곳곳의 지명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해방 이후 ‘정명개정위원회’(町名改正委員會)가 구성되어 일본식 이름을 소거하였으나 지금도 만석동, 송도[주해 1]와 같은 이름이 남아있다.[12]
1945년 9월 8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군이 인천을 통하여 상륙하였다. 1950년 9월 15일 있었던 인천상륙작전은 한국 전쟁의 국면을 크게 전환하였다. 수세에 밀렸던 대한민국은 이 작전을 계기로 공세로 전환하여 북진할 수 있었다.[13]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인천은 수도권의 주요 수출입 항만이 되었다. 산업화가 진행됨에 때라 인천항은 계속하여 확충되었고, 인천 내항이 맞고 있던 역할은 북항, 연안부두, 남항 등지로 분산 이전되었다. 이로 인해 내항 앞에 형성되어 있던 인천 차이나타운의 화교들은 경제 침체를 맞기도 하였다. 한편, 인천 각지에는 공업단지가 조성되었다.
오늘날 인천에 속한 행정구역은 근대 이전까지 전통적으로 서로 다른 지역사를 갖는 여러 지방이 묶여 있다. 원래의 인천은 지금의 인천광역시 남부와 경기도 시흥시 북부 일대였고, 그 중심지는 인천도호부가 있던 문학산을 중심으로 한 미추홀구 남부(옛 인천도호부 부내면) 일대였고, 개항 이후 인천의 중심지는 제물포 지역으로 이동되었다. 이후 부평과 강화 등이 차례로 인천으로 편입되었다. 오늘날 인천은 8개의 구와 2개의 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013년 기준 인구는 약 293만명이다.[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