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불가리아의 수상이자 코미테른의 서기장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미하일로프(불가리아어: Гео̀рги Димитро̀в Миха̀йлов, 러시아어: Гео́ргий Миха́йлович Дими́тров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디미트로프[*], 문화어: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츠 지미뜨로브, 1882년 6월 18일 코바체프치 ~ 1949년 7월 2일)는 불가리아의 노동운동가, 정치인, 혁명가이다. 코민테른의 서기장으로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했다. 반파시즘 인민 전선 노선을 주장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인민 전선의 일종인 조국 전선을 조직하여 싸웠으며 1946년 9월 15일 왕정 체제가 무너지고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 총리가 되었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Георги Димитро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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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 디미트로프 | |
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제1대 서기장 | |
임기 | 1919년 5월 28일~1949년 7월 2일 |
전임 | 창당 |
후임 | 바실 콜라로프 |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각료회의의 제1대 의장 | |
임기 | 1944년 9월 9일~1949년 7월 2일 |
전임 | 설립 |
후임 | 벌코 체르벤코프 |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의 제1대 총리 | |
임기 | 1946월 10월 5일~1949년 7월 5일 |
전임 | 설립 |
후임 | 바실 콜라로프 |
코민테른 중앙위원회의 서기장 | |
임기 | 1935년~1943년 |
전임 |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
후임 | 안드레이 즈다노프 (코민포름 중앙위원회 서기장) |
이름 | |
별명 | 불가리아의 스탈린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82년 6월 18일(1882-06-18) |
출생지 | 불가리아 공국 코바체프치 |
사망일 | 1949년 7월 2일(1949-07-02) |
사망지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모스크바 |
정당 | 불가리아 노동사회민주당 (1894년 ~ 1903년) 불가리아 노동사회민주당 (볼셰비키) (1903년 ~ 1919년) 불가리아 공산당 (1919년 ~ 1956년) |
종교 | 국가 무신론 |
1933년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발생했을 때 배후에 나치를 둔 독일 경찰은 여행 중이었던 바실 타네프, 블라고이 포포프,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등 불가리아 공산주의자들과 독일 공산당 소속 국회의원 에른스트 토르글러를 당시 현장에서 방화범으로 체포되었던 마리뉘스 판데르뤼버의 공범으로 지목해 그를 체포하였다.
그러나 디미트로프는 판데르뤼버를 전혀 몰랐고, 판데르뤼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치는 디미트로프가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조직하려고 하자 이를 탄압하기 위해서 이 사건을 조작하였다. 나치의 지령을 받은 "증인"들이 디미트로프와 판데르뤼버가 범죄를 모의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디미트로프는 재판 과정에서 괴링을 거꾸로 몰아붙여 괴링을 꼼짝못하게 했고(당시 괴링은 프로이센 자유주 내무장관 자격으로 증인으로 출석했다), 모든 증언들에 대해 거짓임을 입증하였다. 그 "증언"들은 조작된 것이었므로 반박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디미트로프가 뮌헨에 있었을 당시, 베를린에서 판데르뤼버와 만나는 것을 봤다는 식의 증언이었던 것이다.
결국 나치가 사실상 주도적이었던 당시의 독일 사법부는 어쩔 수 없이 판데르뤼버를 제외한 당시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조직하던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였으며 이후 개최되었던 코민테른의 회의에서 디미트로프는 당시의 상황과 경과에 대해서 자시한 설명과 보고 및 평가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