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 모로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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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모로나오(일본어: 高師直)는 일본 가마쿠라 시대 후기부터 난보쿠초 시대에 걸쳐 무로마치 막부 초대 정이대장군인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섬겼던 무장[1]으로 관료이자 정치가, 가인(歌人)이었다. 형제로는 고노 모로야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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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모로나오 高師直 | |
『기마무자상』(교토 국립 박물관 소장) 종래 아시카가 다카우지 상으로 여겨져 왔으나, 모로나오이라는 설이 있다. | |
엇갈린 화환 | |
무사 정보 | |
시대 | 가마쿠라 시대 말기 ~ 난보쿠초 시대 초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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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쇼헤이(正平) 6년/간노(観応) 2년 2월 26일(1351년 3월 24일) |
계명 | 진여사전 도상 대선정문(真如寺殿道常大禅定門) |
주군 | 아시카가 다카우지 |
가마쿠라 막부 유력 고케닌(御家人)이었던 아시카가 씨의 집사(執事)로써 겐무 신정의 잡소결단소(雑訴決断所) 산반부교닌(三番奉行人) ・ 부샤도코로(武者所) 및 와소기인(窪所寄人)을 지내고 북조 정권에서 무사시노카미(武蔵守)、무로마치 막부 초대 및 제3대 집사(무로마치 막부 간레이의 전신이다) ・ 가즈사 슈고(上総守護) ・ 무사시 슈고(武蔵守護) ・ 히키쓰케노도진(引付頭人)의 관직을 지냈다. 정식 명칭은 다카시나노 모로나오(일본어: 高階師直 たかしな の もろなお[*])[설명 1]로 통칭 「고」(高)는 혼세(本姓)로써 우지(氏) 「다카시나」가 아닌 우지가바네(氏姓) 「다카시나노 아손」(高階朝臣)을 줄인 표기로 대부분의 무장들이 영지의 이름을 따서 가문의 묘지(名字)를 지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진기한 것이었다.[설명 2]
모로나오는 두 차례, 15년 동안(1336–1349년、1349–1351년)에 걸쳐 무로마치 막부의 집사로써 뛰어난 행정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는 전대 겐무 정권의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이 제정한 선구적인(하지만 당시로써는 실정과 맞지 않다는 비판도 있었던) 법 제도를 개량하여 막부에 도입, 초대 쇼군(将軍) 다카우지 아래서 무로마치 막부 초창기의 정치기구(政治機構) ・ 법 체계를 정비한 혁신파 명재상이기도 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정책으로는 집사시행장(일본어: 執事施行状 しつじしぎょうじょう[*])의 고안 ・ 발급을 들 수 있는데, 유효한 기능을 하였다는 점에서는 일본에서 최초로 토지 급부의 강제집행 도입 사례였다고 평가받는다.[설명 3][설명 4] 원래 가마쿠라 막부에서는 무사나 지샤(寺社)가 법적으로 획득한 은상(恩賞, 영지)의 실효지배는 현지에서 영지를 소유한 무사들이 알아서 지키도록 위임했기에 약소한 무사 ・ 지샤에서는 힘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영지를 불법으로 침략, 점거하더라도 이를 쫓아낼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겐무 정권의 고다이고 천황은 약자를 보호한다는 질서를 유지하고자 일본 최초의 은상 완행의 강제 집행을 도입하였으나(잡소결단소첩雑訴決断所牒), 수속이 번잡하였기에 원활하게 기능하지 못하였다. 이를 모로나오는 무로마치 막부의 집사로써 토지 급부의 강제집행 수속을 신청시 ・ 실행시 양방으로 간편화하여 집사시행장을 고안하였다. 이 법제 개량으로 약소 무사 ・ 지샤에 대한 구제가 보다 실효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으며, 무로마치 막부의 구심력을 높이는 데 성공하였다.
나아가 무장으로써도 북조 ・ 무로마치 막부 내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으로 형제인 모로야스와 함께 겐무의 난(建武の乱)이나 남북조의 내란에서 활약하였다. 전장에서는 전통보다는 합리성을 중시하여 수급 확인 수속을 간략화하여 대규모 군사행동을 가능하게 한 분도리키리스테(分捕切捨)라는 법을 처음으로 채용하였다. 한편으로는 이와시미즈 하치만구(石清水八幡宮) ・ 요시노 행궁(吉野行宮) ・ 긴푸센지(金峯山寺) 자오도(蔵王堂) 등의 성역(聖域)에 대한 무차별적인 화공(火攻)을 감행하여 당시 구게(公家) 사회에 충격을 주었으며, 이는 모로나오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이와쓰 전투(石津の戦い, 1338년)에서는 남조측의 구교(公卿) ・ 진수부대장군(鎮守府大将軍) 기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를, 시죠나와테 전투(四條畷の戦い, 1348년)에서는 남조의 기나이(畿内) 전력을 통솔하고 있던 구스노키 씨(楠木氏)의 도료(棟梁, 당주) 구스노키 마사유키(楠木正行)를 쳐서 무사로써의 이름과 권세를 높였다.
그러나 혁신적인 정책과 급속한 세력확대로 인해 쇼군 다카우지의 동생으로 막부 최고지도자였던 보수파의 아시카가 다다요시(足利直義)와 대립하였고, 나아가 은거해 있던 쇼군 다카우지도 휘말려들게 만든 아시카가 집안의 내분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 1350–1352년)으로 번졌다. 한때는 다다요시를 제압하기도 했으나 최종적으로는 다다요시가 남조측으로 이반하여 무력을 회복하고 우치데노하마 전투(打出浜の戦い, 1351년)에서 패배하고 투항, 2월 26일에는 호송 중에 다다요시파였던 우에스기 요시노리(上杉能憲) 등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한편 앞서 언급한 성역 소각 사건은 확대해석하여 군키모노(軍記物) 『태평기』(太平記, 1370년경)는 신불(神仏)도 업신여기는 악역무도한 자로써 그려져 있으며, 그가 저질렀다는 갖가지 악행들이 묘사되어 있으나, 화공을 저지른 것 이외의 폭거들에 대한 것은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 역사적으로 모로나오가 저지른 것으로 확인되는 성역에 대한 화공도 공인(公人)으로써의 요청에 쫓긴 고육지책으로, 모로나오 개인으로써는 경건하고 모범적인 인물이었다. 공무 외의 활동으로는 많은 기진(寄進)을 행하여 교토(京都)의 임제종(臨済宗) 사찰인 진여사(真如寺)를 재건시켰으며 이후 진여사는 무로마치 시대 교토 10찰(京都十刹)의 하나로 꼽히고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다. 와카(和歌)나 서예에도 뛰어나 가인으로써 칙찬(勅撰) 와카 모음집 『풍아화가집』(風雅和歌集, 1346년)에도 그의 작품이 실렸던 등 당시 무사로써는 보기 드물게 높은 교양을 지닌 문화인이자 풍류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