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영국으로의 공급선을 끊으려는 시도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대서양 전투(大西洋戰鬪, 영어: Battle of the Atlantic)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가장 오래 지속된 군사 전역 중 하나이다.[4][5] 전역은 1939년부터 시작되어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배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연합국의 독일 해상 봉쇄가 중심이었던 이 전투는 전쟁 선포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고 독일의 봉쇄 반격전으로 이어졌다. 1940년 중반부터 1943년까지 전쟁은 정점에 다다랐다. 대서양 전투는 유보트와 전쟁해군의 다른 전함들, 루프트바페의 항공기가 캐나다 해군, 영국 왕립해군, 미국 해군과 연합국 상선에 맞서 싸운 전투였다. 수송선은 주로 북아메리카에서 출발해 영국이나 소련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대부분 영국과 캐나다 해군 및 공군이 이들을 보호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병력들은 1941년 9월 13일부터 미국의 선박과 항공기의 지원을 받았다.[6] 독일은 이탈리아 왕국 해군의 지원을 받았는데,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 왕국이 추축국 편을 든 이후부터 지원이 시작되었다.
대서양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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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
1941년 10월, 가교 위의 영국 사무관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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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브라질 (1942-) | 이탈리아 왕국 (1940-1943) | ||||||
지휘관 | |||||||
마틴 네스미스 |
에리히 레더 | ||||||
피해 규모 | |||||||
전투함 175척 침몰 상선 3500척 침몰 전투함 승조원 36200명 사망[1][2] 상선 승무원 36000명 사망[1][2] |
잠수함 783척 침몰 잠수함 승조원 ~30000명 사망[3] |
섬나라였던 영국은 수입품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영국은 전쟁에서 살아남고 전투를 하기 위해 매주 수백 만 톤의 수입품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필수적으로 대서양 전투는 용적 전쟁이었다. 연합군은 영국에 보급품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했고, 추축국은 영국이 전쟁을 이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상선단을 제거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1942년 이후부터 연합군이 유럽 본토 침공을 준비하기 위해 영국 제도에 보급품 또는 장비 시설이 건설하자 독일군은 이것을 막고자 노력했다. 유보트의 위협을 물리치는 것이 추축국을 몰아내는 사전 작업이었다. 전투의 결과는 연합군의 전략적 승리였다. 독일 봉쇄는 실패했으며 연합국의 상선 3,500척과 전함 175척이 격침되었고 유보트 783척이 공격으로 침몰했다.
"대서양 전투"는 윈스턴 처칠이 1941년 2월 붙인 이름이다.[7] 이 전투는 해전사 상 "가장 길고, 규모가 컸으며 복잡한 전쟁"이라고 불리고 있다.[8] 대서양 전투는 유럽 전선이 개시된 직후 시작되었는데, 가짜 전쟁이라 불린 기간부터 시작되어 독일의 항복이 1945년 5월 이뤄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100번 이상의 수송선 전투와 1,000번의 함선 교전에서 수 천대의 함선이 동원되었다. 상황은 지속적으로 변했다. 참전국이 항복하거나 새로 참전하는 국가가 생기거나 편을 바꾸는 경우, 그리고 신무기와 새로운 전략, 대치방법, 그리고 무기가 개발되면서 한 쪽이 이득을 얻게 되었다. 연합국은 1942년 말 독일에 승기를 잡기 시작했고, 1943년부터는 유보트 편대를 격퇴할 수 있었으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