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니드 핸드
미국 판사, 법학자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빌링스 러니드 핸드(Billings Learned Hand, 1872년 1월 27일~1961년 8월 18일)는 미국 판사이며 법 철학자이다. 그는 남부 뉴욕 지구의 지방 법원 판사를 했고 이후에는 미국 항소법원에서 일했다. 핸드는 다른 어떤 하급판사보다 미국 연방 대법원과 법학자들이 더 자주 인용하는 판사이다.[1]
러니드 핸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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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 | 1872년 1월 27일 뉴욕주 올버니 |
사망 | 1961년 8월 18일(1961-08-18)(89세) 뉴욕 |
성별 | 남성 |
직업 | 미국 항소법원의 판사 |
학력 | 하버드 대학교 A.B., LL.B. |
종교 | 어렸을 때 개신교, 어른이 된 후에는 불가지론 |
배우자 | 프랜시스 어밀리아 핑크 핸드(Frances Amelia Fincke Hand) |
자녀 | 메리 더숀(Mary Deshon), 프랜시스(Frances), 콘스턴스(Constance) |
활동 정보 | |
전임자 | 줄리우스 마슈츠 메이어(Julius Marshuetz Mayer) |
후임자 | 해럴드 레이먼드 메디나(en:Harold Raymond Medina) |
미국 뉴욕주 올버니에서 태어나고 자란 핸드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부를 철학 전공으로 수마 쿰 라우데(최우수) 졸업하고 로스쿨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올버니와 뉴욕 시에서 짧은 변호사 생활을 거친 후, 그는 맨해튼에 있는 연방 지방 법원 판사로 1909년 37세의 나이에 임명되었다. 이 직업은 그의 초연하고 열린 기질과 잘 맞았고, 그가 내린 판결 덕분에 곧 그는 높은 평가와 권위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1909년에서 1914년 사이에, 그는 허버트 크롤리의 사회 이론에 영향을 받아서 신 민족주의(New Nationalism)를 지지하였다.
핸드는 언어에 재능이 있었으며, 그의 글쓰기는 법문학으로 칭찬 받았다.[2] 그는 1944년 센트럴 파크에 관용(tolerance)을 대중에게 호소하는 내용을 담은 짧은 글을 붙이면서 그 일을 계기로 법원 밖에서 명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국가 전복에 대한 히스테리적인 공포가 나라를 분열시키고 있을 때, 핸드는 시민의 자유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로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핸드의 글을 모은 책은, 1952년에 《자유의 영혼》(The Spirit of Liberty)라는 제목을 출간되었다. 비록 그가 1950년대 워런 법원 시대에 인권 적극주의(judicial activism)를 비판했음에도, 핸드는 자신의 인기를 유지하였다.
핸드는 성문법 해석 분야에서 현대적인 접근의 개척자로 기억되고 있기도 하다. 미국 특허법, 불법 행위(torts), 해사법, 미국 반독점 법을 비롯한 특정 분야에서 그의 판결은, 영속하는 명확한 기준이 되었다. 헌법 문제에서, 그는 정치적으로 매우 진보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사법 제한주의(judicial restraint)의 지지자이었다.[주해 1] 그는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사회 경제적 문제에 대한 과감한 입법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미국 헌법이 법원에게 선출된 국회의원의 입법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대신에 그는 "나에게 모든 좋은 정부의 핵심(원어:epitome-직역:개요, 발췌, 축소판의 뜻)은 관용과 상상력의 결합"이라고 주장했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