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폴란드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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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소련의 폴란드 침공(영어: 1939 Soviet invasion of Poland)은 극동에서 소련과 일본 제국이 할힌골 전투를 치른 직후인 1939년 9월 17일 공식적인 선전포고 없이 폴란드와 소련 간에 일어난 전쟁이다. 1939년 9월 15일 몰로토프-토고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9월 16일 휴전 협정이 발효되었다.[6] 9월 17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한 지 6일 후 소련은 폴란드 침공을 시작했다. 이 침공은 1939년 10월 6일 끝났으며 폴란드 제2공화국 영토 전체는 나치 독일과 소련 간 분할통치 되었다.
소련의 폴란드 침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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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 침공의 일부 | |||||||
1939년 리비우에서 소련군의 행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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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폴란드 제2공화국 | 소련 | ||||||
지휘관 | |||||||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벨라루스 전선군) 미하일 코발료프 (벨라루스 전선군) 세묜 티모셴코 (우크라이나 전선군) | ||||||
병력 | |||||||
폴란드 국경 방어 군단 20,000명,[1][Note 1] 폴란드 육군 250,000명.[2][Note 2] |
466,516명–800,000명[2][3] 33개 사단 이상 11개 연대 이상 포 4,959문 전차 4,736대 전투기 3,300기 | ||||||
피해 규모 | |||||||
3,000명–7,000명 사망 또는 실종,[1][4] 20,000명 이상 부상.[1][Note 3] |
1,475명–3,000명 사망 또는 실종 2,383명–10,000명 부상.[Note 4] |
베르사유 조약 | 19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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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제르맹 조약 | 1919년 |
소련-폴란드 전쟁 | 1919-1920년 |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 | 1919-1920년 |
트리아농 조약 | 1920년 |
라팔로 조약 | 1920년 |
프랑스-폴란드 동맹 | 1921년 |
로마 진군 | 1922년 |
코르푸섬 사건 | 1923년 |
루르 점령 | 1923-1925년 |
나의 투쟁 | 1925년 |
제2차 이탈리아-사누시 전쟁 | 1923-1932년 |
도스 플랜 | 1924년 |
로카르노 조약 | 1925년 |
영 플랜 | 1929년 |
대공황 | 1929년 |
만주 사변 | 1931년 |
만주국 대분란전 | 1931-1942년 |
제1차 상하이 사변 | 1932년 |
제네바 회담 | 1932-1934년 |
제1차 허베이성 전쟁 | 1933년 |
러허 사변 | 1933년 |
아돌프 히틀러의 권력 장악 | 1933년 |
탕구 협정 | 1933년 |
이탈리아-소련 협정 | 1933년 |
내몽골 작전 | 1933-1936년 |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 | 1934년 |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 | 1935년 |
소련-체코슬로바키아 상호원조조약 | 1935년 |
허메이 협정 | 1935년 |
영독 해군협정 | 1935년 |
12월 9일 운동 | 1935년 |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 1935-1936년 |
라인란트 진주 | 1936년 |
팔레스타인 아랍 봉기 | 1936-1939년 |
스페인 내전 | 1936-1939년 |
독이 협정 | 1936년 |
방공 협정 | 1936년 |
쑤이위안 작전 | 1936년 |
시안 사건 | 1936년 |
루거우차오 사건 | 1937년 |
중일 전쟁 | 1937-1945년 |
USS 파나이 사건 | 1937년 |
안슐루스 | 1938년 3월 |
1938년 폴란드의 리투아니아 최후통첩 | 1938년 3월 |
5월 위기 | 1938년 5월 |
하산호 전투 | 1938년 7-8월 |
블레트 협정 | 1938년 8월 |
비선전포고 독일-체코슬로바키아 전쟁 | 1938년 9월 |
뮌헨 협정 | 1938년 9월 |
제1차 빈 중재 | 1938년 11월 |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 1939년 3월 |
헝가리의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 침공 | 1939년 3월 |
1939년 독일의 리투아니아 최후통첩 | 1939년 3월 |
슬로바키아-헝가리 전쟁 | 1939년 3월 |
스페인 내전의 최후 공세 | 1939년 3-4월 |
단치히 위기 | 1939년 3-8월 |
영국-폴란드 군사 동맹 | 1939년 3월 |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 1939년 4월 |
소련-프랑스-영국 협상 | 1939년 4-8월 |
강철 조약 | 1939년 5월 |
할힌골 전투 | 1939년 5월 |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 | 1939년 8월 |
독일의 폴란드 침공 | 1939년 9월 |
소련의 폴란드 침공 | 1939년 9월 |
1939년 초, 소련은 나치 독일에 대항한 영국, 프랑스, 폴란드, 루마니아 왕국의 동맹에 가입한다. 소련과의 집단 안보 협상은 루마니아와 폴란드에 소련군이 이동할 수 있다는 권한에 반대하여 무산되었다.[7] 이 협상의 실패는 8월 23일 나치 독일과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되는 원인이 된다. 이 불가침 조약에는 북유럽과 동유럽에서 독일과 소련의 정치적 영역을 나누는 비밀 조항도 포함되어 있었다.[8] 불가침 조약 서명 일주일 후인 9월 1일, 독일군은 동부, 서부, 북부에서 폴란드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폴란드군이 남동부로 철수한 이후,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지원을 기대하며 루마니아 교두보에서 장기간 방어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붉은 군대가 9월 17일 비밀 조항에 따라 케르시를 침공하기 시작한다.[9][Note 5] 폴란드가 나치 독일의 공격으로 붕괴하여 시민의 안전을 더 이상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폴란드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공격했다.[12][13][14][15] 양면 전선에 직면한 폴란드는 루마니아 교두보 방어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루마니아 중립국으로 모든 병력을 대피하라는 지시를 내린다.[1]
붉은 군대는 그 목표를 달성하여 폴란드의 저항을 무너뜨리고 포로 23만명을 얻었다.[4][16] 소련 정부는 통제하에 1939년 11월 폴란드 점령 영토를 합병했으며 폴란드 시민 1350만명이 소련 시민이 되었다. 소련 정부는 즉시 병합 영토에서 소비에트화를 시작했다. 선거 개최를 포함하여 소련은 폴란드 동부 합병을 정당화하기 위한 법적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재판 외 형벌을 통해 수 천 명의 반대 시민을 진압 및 체포하였다.[17][18] 소비에트 연방은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점령 지역의 시민 수 천만 명을 4차례에 걸쳐 시베리아 및 기타 원격지로 수용하였다.[Note 6]
소련군은 1941년 여름까지 폴란드 동부를 점령했으며, 이후에는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침입한 독일군이 점령했다. 이 지역은 1944년 여름까지 나치 독일이 점령하게 된다. 얄타 회담에서는 소련이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으로 폴란드 제2공화국에 얻은 영토를 점령할 수 있게끔 했고, 대신 폴란드 인민 공화국은 동프로이센과 오데르-나이세선 동부의 영토를 얻을 수 있게 하였다.[21] 소련은 대부분의 영토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할양했다.[21]
1945년 8월 독일이 항복하면서 1945년 8월 폴란드-소련 국경 조약을 통해 소련-폴란드 간 국경을 명시화했다. 이 조약은 공식적으로 비아위스토크 주변 지역과 프셰미실 부근의 산강 동부의 갈리치아 일부를 폴란드가 합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