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아힘 가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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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가우크(독일어: Joachim Gauck, 1940년 1월 24일 ~ )는 2012년 3월부터 2017년 3월까지 집권한 독일의 전 대통령으로, 독일의 정치인, 종교인, 인권운동가다. 전직 루터교 목사였으며, 통일 전 동독에서 반공 시민권 운동가로 명성을 얻었다.[1][2][3]
요아힘 가우크 Joachim Gauc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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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연방대통령 | |
임기 | 2012년 3월 18일~2017년 3월 18일 |
전임 | 호르스트 제호퍼(권한대행) |
후임 |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
수상 | 앙겔라 메르켈 |
독일의 초대 슈타지기록물연방처장 | |
임기 | 1990년 10월 4일~2000년 10월 10일 |
후임 | 마리아네 비어틀러 |
신상정보 | |
출생일 | 1940년 1월 24일(1940-01-24)(84세) |
출생지 | 나치 독일 로스토크 |
정당 | 노이에스 포룸/동맹 90(1989년~1990년) 무소속(1990년~) |
배우자 | 게르힐트 라트케(1959-1991; 이혼) 다니엘라 샤트(2000년 사실혼) |
자녀 | 4명 |
종교 | 루터교 |
서명 |
대학에서는 신학을 전공해 1965년부터 1990년까지 메클렌부르크에서 종교활동을 하면서 여러 해 목사로도 활동했다. 그는 1990년 3월 동독에서 실시한 최초의 자유 총선거에 출마해 정계에 진출했고 국가보안부(STASI) 해체 작업을 지휘했다. 통일 후 91~2000년에는 국가보안부 기밀문서 정리 총책임자 임무를 수행했다.[4]
연방 위원으로 지내면서 공산주의 정권의 비밀 경찰들이 저지른 죄를 밝혀냈고 “슈타지 사냥꾼”, “쉼없는 친민주주의 대변자”로 유명해졌다.[5]
지난 2010년 6월 대선에서 야당인 사회민주당(SPD)과 녹색당(Greens)의 후보로 나서 불프 전임 대통령과 3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석패한바 있다.[6]가우크의 출마에 대해 독일의 대표 시사잡지인 슈피겔 지는 “가우크는 더 나은 대통령”[7]이라 언급했으며, 독일의 신문사인 빌트 지는 “마음의 대통령”[8]으로 부르는 등 이처럼 여론과 매체는 그에게 확연한 호평을 보냈다. 크리스티안 볼프가 중도 퇴진한 후 가우크는 2012년 선거 당시 연방 회의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기독교민주연합(기민당 CDU),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CSU), 자유민주당(FDP), 독일사회민주당(SPD), 녹색당의 합의를 통해 1228 유효투표 중 991표를 얻어 제 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9]
가우크의 정치 인생은 굴라그 생존자인 아버지[10][11][12][13]를 비롯하여 전체주의 체제 하에서 가족이 겪은 경험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체포돼 시베리아 수용소에 끌려간 이후 동독 체제에 대해 반감을 지녔으며 자란 후에는 동독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면서 베를린 장벽을 붕괴시키는 데 이바지했다.[14]
가우크는 바츨라프 하벨 외 선언자들과 함께 유럽 양심과 공산주의에 대한 프라하 선언을, 그리고 공산주의 범죄에 대한 선언을 만들고 서명했다. 가우크는 유럽에서 자행된 공산주의 범죄를 인식해야 하며 공산주의 시대를 부정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1] 또한 The Black Book of Communism을 포함하여 여러 책을 직접 저술하거나 공동 저자로 참여했다. 2012년도 저서인 “Freedom. A Plea” 에서는 전 지구상의 자유와 인권을 지킬 것을 주창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가우크를 “민주주의의 진정한 스승”, “자유, 민주, 정의의 쉼없는 대변자”로 칭했다.[15] 월스트리트저널은 가우크를 “최후의 후예 : 철의 장막 뒤에서 저항 운동을 이끌었으며 멈추지 않고 1989년부터는 나라를 이끈 사람”[16]으로 묘사했다. 가우크는 1997년 한나 아렌트 상을 포함하여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