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대한민국의 11대.12대 대통령 (1931–2021)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전두환(한국 한자: 全斗煥, 1931년 1월 18일~2021년 11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이다.
전두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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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 | |
임기 | 1980년 9월 1일~1988년 2월 24일 |
국무총리 | 남덕우(1980년~1982년) 유창순(1982년) 김상협(1982년~1983년) 진의종(1983년~1985년) 노신영(1985년~1987년) |
전임: 최규하(제10대) 후임: 노태우(제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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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일 | 1931년 1월 18일(1931-01-18)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
사망일 | 2021년 11월 23일(2021-11-23)(90세)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
국적 | 대한민국 |
본관 | 완산 |
학력 | 육군사관학교 11기 학사 |
정당 | 무소속(1980년~1981년) 민주정의당(1981년~1988년) 무소속(1988년~2021년) |
부모 | 전상우(부), 김점문(모) |
배우자 | 이순자 |
자녀 | 3남 1녀 |
종교 | 불명 |
별명 | 호: 일해(日海) 자: 용성(勇星) |
서명 | |
군사 경력 | |
육군 대위 시절의 전두환(1959년) |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복무기간 | 1955년 2월~1980년 8월 22일 |
최종계급 | 대장 |
지휘 |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대대 대대장 육군 제9보병사단 제29연대 연대장 육군 제1공수특전여단 여단장 육군 제1보병사단 사단장 국군 보안사령부 사령관 |
참전 | 베트남 전쟁, 한국 전쟁 |
경상남도 합천군에서 태어나 5살에 대구로 이주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자진하여 대한민국 국군으로 참전하였다.[1]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전방 야전군 장교 시절을 거쳐, 5·16 군사정변 직후 국가혁명위원회에 가담하였고, 베트남전에 연대장으로 참전하였다. 그후 보안사령관, 중앙정보부장 서리, 국보위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 육군 대장 예편 후 정계에 입문하였다.
1955년 3월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소대장, 장교, 육군보병학교 구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육사 11기 모임인 북극성회와 군내 기수별 친목모임인 하나회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하나회의 지도세력의 일원으로 성장하였다. 1961년 5월 16일 5.16 당시 육사생도들의 쿠데타 지지 시위를 주도하였다. 1963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관과 중정 인사과장 등을 거쳐 1970년 11월부터 1년간 백마부대 29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가 귀국하였다. 1973년에는 1공수특전여단장 재직 중 윤필용 사건으로 숙청될 뻔한 위기를 넘기고 1976년 3월 차지철, 박종규 등의 추천으로 대통령 경호실 작전차장보 겸 보안차장보로 발탁되었다. 동시에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3월 육군본부 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되고, 10.26 사태 후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박정희 저격 사건을 수사하였다. 1979년 12월 12일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김재규의 협력자라는 혐의로 체포한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였다.
1980년 3월에는 최규하, 신현확에게 중앙정보부장직을 요구, 그해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겸직하였으며 대학생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발동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압을 주도하였다.[2] 5월 27일에는 국보위를 조직하고 상임위원장이 되어 정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1981년 3월 3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장충체육관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81년 3월 3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3][4] 통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그해 5월 국풍 81 축제를 개최하여 광주민주화운동 1주기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시도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후 1982년 한국프로야구를 창설하고 야간통행금지 조치를 해제하였으며, 학원 두발/복장 자율화 정책을 시도하고 서울지하철2, 3, 4호선 등의 선진국형 국토개발에 주력하여 신군부에 반발하는 세력을 유화시킴과 동시에 국가의 문화 산업 발전과 국민 생활의 질적 향상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 프로스포츠 산업, 컬러 텔레비전 보급, 포르노 영화 장려로 대표되는 3S 정책 또한 이러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한편, 표면적으로는 '선진국으로 발돋움 하기 위한 새질서를 확립한다'는 목적으로 삼청교육대(그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재임 중 1980년 8월 4일 창설, 비상계엄령 해제로 1981년 1월 25일 폐지.)를 창설했다.
이러한 탄압의 연장선에서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일어난 6월 항쟁에 따라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1987년 6월 29일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였다. 대통령 직선제 실시, 6.29 선언 따라 후임 노태우 대통령이 제12대 대통령으로 임시취임했다. 1989년 12월 31일 13대 국회의 증언대에서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을 '자위권 발동'이라고 진술하여 의원들의 항의를 받았다. 현재 자신의 지갑에 29만원 밖에 없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직 퇴임 이후 8년 뒤인 1995년에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1심에서는 사형을,[5]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1997년 12월 22일에 사면·복권되었다. 사실 그에 대한 당시 국민적인 여론을 보면 1996년 12월 19일, MBC와 한국갤럽이 발표한 전두환 감형에 대한 여론조사결과는 뜻밖이었다. 전국의 성인남녀 551명을 전화 여론 조사한 결과 전두환 감형에 대해 적절했다는 대답이 44%, 부적절하다는 대답이 47.9%로 적절하지 않았다는 응답이 약간 더 많았다. 전두환이 6.29 선언을 주도했다는 주장이 사실일 경우 감형이 잘한 일인가에 대해서는 32.9%만이 잘한 일이라고 답해 6.29가 감형요인이라고는 보지 않는 경향이 우세했다. 노태우 감형에 대해서는 32.8%만이 적절하다고 답했고, 부적절하다는 답변은 57.4%로 당시 노 씨에 대한 국민정서가 전 씨에 비해 더 비판적이었다. 또 6.29를 내란종료 시점으로 규정한 재판부의 판단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각이 56.4%로 우세했다. 전·노 두 사람이 김영삼 대통령 임기 안에 사면될 것이라는 전망은 42.2%,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은 40.5%로 엇비슷했다.[6] 결국 1997년 12월, 제15대 대선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3후보 모두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복권을 공약으로 내세워 논란을 빚기도 했고[7][8][9][10] 이 전두환은 김대중대통령 시절인 1999년 사면된 이후에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계복귀를 노려왔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었다.[11]
1999년 3월에는 전두환과 5공 출신 인사들의 정계복귀가 밝혀져 눈길을 끌었다.[12][13]
1999년 8월 31일, 전두환은 김중권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골프회동에서 정계복귀에 대한 여운을 남겼다.[14] 당시 전두환은 특가법상 뇌물수수죄로 추징금 2,200억원을 선고받았다. 2013년 9월에 추징금 완납 계획을 발표했으나 아직 완납하지 않은 상태이다.
2017년 자신의 회고록 '혼돈의 시대'에서 "5·18 민주화운동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조비오 신부에 대해 '성직자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서술하여 2018년 사자 명예훼손으로 광주지방법원에 공소가 제기되었으나 형사소송법에 따라 "주거지 관할 법원으로 이송해달라"며 재판에 불출석하여 강제구인 논란이 있은 끝에 2019년 3월 11일 대통령 재직시절 이후 35년 만에 광주로 내려가 재판에 참석했다. 2020년 4월 27일 전두환은 또다시 광주로 내려가 재판에 참석했는데 이날 재판에서의 불성실한 태도로 맹비난을 받았다.[15] 형사소송법에서 재판 관할은 범죄지와 피의자 소재지 중에 하나로 하며 기소된 이후에는 '재판장이 피고인 소재지 등을 이유로 이송할 수' 있음에도 재판 관할 위반에 대한 논란 없이 전두환의 재판 불출석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면서 재판에 출석했을 때는 항의 시위가 있었다.
2020년 11월 30일 3번째로 광주에 다시 내려가 재판에 참석했는데 자신을 비난하는 시위대에 말조심해 이놈아라고 소리를 치고 성질을 내며 시위대와 말싸움까지 오갔고 재판중에도 여전히 불성실한 태도로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이날 전두환에게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다.[16][17]
2021년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에 확진되어 건강이 악화되었다. 2021년 10월 26일 70년 친구였던 노태우 대통령이 향년 90세를 일기로 서거한 이후 28일 뒤인 2021년 11월 23일 오전 8시40분경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대변을 보던 와중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오전 9시12분 사저에 방문한 경찰에 의해 사망 판정을 받으며 향년 91세로 서거하였다. 빈소는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졌으며 장례는 국가장이 아닌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유해는 화장하여 연희동 자택에 임시 안치되었다.[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