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2세 (잉글랜드)
잉글랜드 및 스코틀랜드의 군주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제임스 2세(영어: James Ⅱ, 1633년 10월 24일 ~ 1701년 9월 16일)는 1685년 2월 6일 형이었던 찰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제임스 2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7세로서 재위하였다. 재위 기간 내내 의회와 갈등하였던 그는 결국 1688년 명예혁명으로 폐위되었다. 제임스 2세의 퇴위는 이미 한 세기 가량 지속되어 온 잉글랜드 내의 종교적 갈등 속에서 그가 로마 가톨릭교회를 신봉한다는 것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였지만 스튜어트가의 왕권신수설에 따른 절대주의 주장과 잉글랜드 의회의 협치 권한에 대한 요구가 충돌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충돌의 결과로 발생한 명예혁명과 왕권 교체는 왕위의 계승에 대한 의회 결정의 우선권을 확인하는 것을 의미하였다.[1]
제임스 2세 James I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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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2세 (1684년) | |
잉글랜드 국왕 스코틀랜드 국왕 | |
재위 | 1685년 2월 6일 ~ 1688년 12월 11일 |
전임 | 찰스 2세 |
후임 | 윌리엄 3세 메리 2세 |
신상정보 | |
출생일 | 1633년 10월 24일(1633-10-24) |
출생지 | 영국 런던 세인트제임스궁 |
사망일 | 1701년 9월 16일(1701-09-16)(67세) |
사망지 | 프랑스 생제르맹앙레 성 |
가문 | 스튜어트 |
부친 | 찰스 1세 |
모친 | 헨리에타 마리아 |
배우자 | 클래런던 백작 영애 앤 하이드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스테 디 모데나 공녀 |
자녀 | 메리 2세 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제임스 피츠제임스 |
종교 | 잉글랜드 성공회 → 로마 가톨릭 |
1642년 시작된 잉글랜드 내전과 그에 이은 삼왕국 전쟁을 거쳐 국왕이었던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세워진 공화국이었던 잉글랜드 연방이 올리버 크롬웰 사후 내분으로 붕괴하고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가 이루어 진 뒤, 잉글랜드 내에서는 왕위의 계승권을 놓고 지속적인 갈등이 있었다. 이전의 청교도가 장악하였던 장기의회를 대신하여 왕당파가 장악한 기사 의회는 국왕의 지위에 대해서는 확고한 충성을 보였으나 종교적 문제에 대해서는 형벌법과 심사율을 통해 잉글랜드 국교회의 독점적 국교 지위 확보를 추진하였고, 특히 가톨릭에 대해 온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던 스튜어트 왕가의 관용 정책은 의회의 반발을 샀다.
의회의 강경파가 가톨릭 교도는 잉글랜드의 국왕이 될 수 없다는 배척법을 발의하자 이를 왕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찰스 2세는 의회를 해산하고 독단으로 국정을 운영하였으며 의회는 배척법을 추진하는 휘그당과 반대하는 토리당으로 양분되었다. 이러한 정치 상황은 제임스 2세의 왕위 계승 시기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미 17세기 대부분을 내전과 갈등 속에 보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는 찰스 2세가 사망하자 제임스 2세의 즉위에 대해 광범위한 지지를 보였다. 당시까지도 군주의 지위는 혈통을 따라 계승되는 신성한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2]
제임스 2세는 흔히 잉글랜드의 마지막 가톨릭 군주로 평가되지만, 그의 개인적 신앙과는 별개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확고한 개신교 국가였으며 제임스 2세의 종교적 관용 정책은 두 국가의 의회에서 거부되었다. 이는 제임스 2세의 치세 내내 중요한 갈등 원인이었지만 실제 그가 폐위까지 몰리게 된 데는 종교적 이유보다 스트어튜가 군주들이 지속적으로 추구하였던 절대 왕권에 대한 의회의 반발이 더 컸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3]
1688년 6월 제임스 2세의 적장자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태어나자 잉글랜드의 왕위가 가톨릭 군주에게로 계속하여 계승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커졌다. 잉글랜드 국교회는 수장령에 의해 잉글랜드의 국왕을 수장으로 하여 가톨릭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그 수장인 국왕이 계속하여 가톨릭을 표방한다면 교회 자체가 붕괴되는 위기를 맞게 되기 때문이다. 당시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서열은 적장자에게 우선권이 주어졌고 적장자가 없을 경우 장녀에게 순위가 돌아갔기 때문에 적장자의 탄생은 곧바로 개신교도이자 네덜란드의 오라녜공 빌럼와 결혼한 메리 스튜어트의 왕위 계승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여기에 더해 제임스 2세가 잉글랜드 국교회의 주교 일곱 명을 선동죄로 기소하자 각지에서는 반가톨릭 봉기가 빈발하였고 자칫 다시 내전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을 키웠다.[2]
잉글랜드 의회는 이러한 위기를 제임스 2세의 폐위와 그의 딸 메리의 계승으로 해결하고자 하였고 오라녜공 빌럼을 잉글랜드로 불러들였다. 1688년 11월 5일 오라녜공 빌럼이 잉글랜드의 브릭섬에 상륙하자 잉글랜드의 군대는 교전을 거부하고 탈영하였고 제임스 2세는 더 이상 이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12월 23일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피하였고, 이듬해인 1689년 2월 잉글랜드 의회는 제임스 2세의 궐위를 이유로 그의 왕위를 부정하고 오라녜공 빌럼과 메리를 공동통치자로 인정하였다. 이로서 오라녜공 빌럼은 잉글랜드의 윌리엄 3세가 되었고 메리는 잉글랜드의 메리 2세가 되었다. 별다른 충돌 없이 군주를 폐위 시켰다는 의미에서 명예혁명으로 불리게 된 이 사건으로 잉글랜드는 군주로 상징되는 국가의 주권이 출생에 따라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의회의 승인으로 확정된다는 원칙을 확립하였다.
제임스 2세가 순순히 자신의 폐위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으며 1689년 3월 14일 주민 대다수가 가톨릭 교도인 아일랜드에 상륙하였고 동시에 전통적으로 스튜어트가를 지지하던 스코틀랜드에서 자코바이트 운동이 봉기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의회마저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의 왕위 계승이 정당하다고 선언하자 제임스 2세는 추가적인 지원군을 확보할 수 없었다. 1690년 7월 제임스 2세의 군대는 아일랜드의 보인 강변을 끼고 윌리엄 3세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였고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오촌당숙이기도 하였던 루이 14세의 보호 아래 여생을 보냈다.
명예혁명이 있었던 당대에는 제임스 2세를 독단적인 폭군으로 평가하는 쪽이 많았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그의 종교적 관용 정책을 재평가하는 경우도 많다. 한편 제임스 2세를 정통성을 지닌 스코트인의 왕으로 여긴 자코바이트는 이후로도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와 손자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주장하며 간헐적인 반란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