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갈리
르완다의 수도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키갈리(영어: Kigali)는 르완다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이곳은 일련의 계곡과 능선이 가파른 경사면으로 연결되어 있는 구불구불한 언덕 지역의 국가 지리적 중심 근처에 있다. 키갈리는 비교적 새로운 도시인데, 1907년 행정 전초기지로 설립된 이래 르완다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1962년 독립하면서 국가의 수도가 되면서 후예에서 중심이 옮겨졌다.
키갈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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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 키갈리 전경; 중간: 키갈리 컨벤션 센터, 키갈리 CBD; 하단: 고릴라 기념물 및 키갈리 시의회, 생 파밀레 교회 | |
좌표: 남위 1° 56′ 38″ 동경 30° 3′ 34″ | |
국가 | 르완다 |
지역 | 키길리 |
설립 | 1907년 |
정부 | |
• 시장 | Samuel Dusengiyumva |
면적 | |
• 수도 | 730 km2 (280 sq mi) |
해발 | 1,567 m (5,141 ft) |
인구 (2022년 인구조사)[1] | |
• 수도 | 1,745,555명 |
• 도시 | 1,518,632명 (87%) |
• 지방 | 226,923명 (13%) |
• 남성 | 888,882명 (50.92%) |
• 여성 | 856,673명 (49.08%) |
시간대 | UTC+2 (CAT) |
• 서머타임 (DST) | UTC+2 (없음) |
지구[2] 1. Gasabo 2. Kicukiro 3. Nyarugenge | |
HDI (2021) | 0.626[3] 중간 · 5개 중 1번째 |
웹사이트 | www |
15세기부터 르완다 왕국이, 그 후 20세기 초에 독일 제국에 의해 통제된 지역에서 1907년 식민지 주민인 리하르트 칸트가 중심 위치, 전망, 보안을 이유로 그의 본부 부지를 선택하면서 도시가 설립되었다. 독일 시대에 외국 상인들이 도시에서 무역을 하기 시작했고, 칸트는 투치족 르완다 학생들을 위해 정부가 운영하는 학교를 열었다. 벨기에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르완다와 부룬디를 통치하여 루안다-우룬디 통치령을 형성했다. 키갈리는 르완다의 식민지 행정 중심지로 남아 있었지만 루안다-우룬디의 수도는 부룬디의 우숨부라(현 부줌부라)에 있었고 키갈리는 독립 당시 인구가 6,000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로 남아있었다.
키갈리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천천히 성장했다. 1990년에 시작된 정부군과 반군 르완다 애국전선 사이의 르완다 내전은 처음에는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1994년 4월에 그의 항공기가 키갈리 근처에서 격추되었을 때 르완다의 대통령인 쥐베날 하브자리마나가 사망했다. 대통령 사망은 이후 르완다 집단학살로 이어졌고, 약 80만에서 100만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르완다 애국전선인 RPF는 전투를 재개하여 1년여 간의 휴전을 종료했다. 이들은 점차적으로 국가 대부분을 장악했고 1994년 7월 4일 키갈리를 점령했다. 대량 학살 이후의 키갈리는 도시의 많은 부분이 재건되면서 급격한 인구 증가를 경험했다.
키갈리시는 르완다의 5개 주 중 하나로 2006년에 경계가 설정되었다. 이 도시는 가사보(Gasabo), 키쿠키로(Kicukiro), 냐루겐게(Nyarugenge)의 3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역사적으로 지역 자치의 중요한 영역을 통제했다. 2020년 1월 개혁으로 이 지역의 권한 대부분이 시 전체 의회로 이양되었다. 또한 이 도시에는 르완다 대통령과 대부분의 정부 부처의 주요 거주지와 사무실이 존재한다. 키갈리의 국내총생산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것은 서비스업이지만 인구의 상당 부분이 소규모 생계형 농업을 포함한 농업에 종사한다. 레저 관광, 회의 및 전시회를 포함한 시 당국의 우선 순위는 외국인 관광객 유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