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공방전 (885–8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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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5-886년간 진행된 파리 공방전은 서프랑크 왕국의 센강 지역에 대한 바이킹들의 습격의 일부였다. 이 전투는 뚱보왕 샤를의 집권기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고, 프랑크 역사와 카롤링거 왕조의 운명의 전환점이기도 하였다. 또한 이 당시에 서프랑크 왕국의 가장 큰 도시들 중 하나였던 파리의 전략적 중요성을 바이킹들에게 확인시켜주기도 하였다. 이 공방전은 아보 케르누스의 라틴어 시 Bella Parisiacae urbis에서 목격담의 주제이기도 하였다.
파리 공방전 (885–88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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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의 확장의 일부 | |||||||
장빅토르 슈네츠가 그린 낭만주의풍의 그림, 노르드인에 맞서 파리를 지켜내는 오도 백작 (1837년작, 갤러리 데 바타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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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서프랑크 왕국 | 덴마크 바이킹 | ||||||
지휘관 | |||||||
파리 백작 오도 파리 주교 고즐랭 작센의 하인리히 † 뚱보왕 샤를 |
Sigfred Sinric 롤로 | ||||||
병력 | |||||||
처음에는 직업 군인 200명 (Abbo Cernuus). 여름 때 지원 병력을 받음. 뚱보왕 샤를은 10월에 그의 병력을 데리고 도착함[2] | 처음에는 300–700척, 30,000–40,000명 (최대치, Abbo Cernuus). 병력의 대다수는 2월에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고, 시그프레드의 병력도 4월에 철수함.[2] |
수백 척의 배들 및 아마 수만 명에 이르는, 바이킹들이 885년 11월 말에 파리 외각에 도착하여, 공물을 요구했다. 파리 백작 오도는 도시를 방어하는 데 겨우 수백 명만을 모을 수 있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요구를 거절했다. 바이킹들은 다양한 공성 무기들을 갖고 공격을 했으나 집중적인 공격에도 파리의 성벽을 돌파하는 데 실패했다. 공방전은 초기의 공격 이후로는 특별한 공격이 없이 수 달간 지속되었다. 공성전이 계속되면서, 바이킹들의 대부분은 파리에서 더 상류쪽으로 약탈하러 떠났다. 바이킹들은 여름 시기에 도기를 차지하려는 최후의 시도가 실패하고 말았다. 10월에, 뚱보왕 샤를이 그의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다.
도시를 지켜내느라 싸우던 파리인들의 불만 때문에, 샤를은 바로 앞에 있던 바이킹들에 대한 공격을 하는 걸 멈추고, 대신에 그는 바이킹들에게 부르고뉴 (당시 반란 중이던)를 약탈하러 센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허락하고 은 700 리브르 (257kg)를 지불할 것을 약속했다.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던 오도는 샤를의 약조를 거부하려 들었다. 888년에 샤를이 죽자, 오도는 프랑크족의 첫 비카롤링거 왕조 출신 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