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라틴어: Marcus Aurelius Antoninus, 121년 4월 26일 - 180년 3월 17일)는 로마 제국의 제16대 황제(161 - 180년)이자 스토아 학파 철학자이다. 그는 오현제 (약 13세기 뒤에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붙인 용어)라고 알려진 통치자들 중 마지막 인물이자, 두 번째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 이전 로마 제국의 상대적 평화와 안정성의 시기인 팍스 로마나 (기원전 27년에서 서기 180년)의 마지막 황제였다. 그는 140년, 145년, 161년에 집정관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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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흉상 | |
제16대 로마 황제 | |
재위 | 161년 3월 7일 – 180년 3월 17일 |
전임 | 안토니누스 피우스 |
공동재위자 | 루키우스 베루스 (161년-169년) 콤모두스 (177년-180년) |
후임 | 콤모두스 |
이름 | |
존호 | Imperator Caesar Marcus Aurelius Antoninus Augustus |
신상정보 | |
출생일 | 121년 4월 26일 |
출생지 | 로마 |
사망일 | 180년 3월 17일(180-03-17)(58세) |
사망지 | 빈도보나 또는 시르미움 |
가문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부친 | 친부 :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양부 : 안토니누스 피우스 |
모친 | 도미티아 칼빌라 |
배우자 | 소 파우스티나 |
자녀 | 14명 |
묘소 | 하드리아누스 영묘 |
마르쿠스는 하드리아누스 치세에 하드리아누스의 조카이자 법무관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칼빌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세 살 때 죽었고, 그의 어머니와 조부가 그를 길렀다.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138년에 사망한 뒤,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의 삼촌인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새로운 후계자로 받아들였다. 그 대가로, 안토니누스는 마르쿠스와, 아일리우스의 아들인 베루스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하드리아누스는 그 해에 죽었고, 안토니누스가 황제가 되었다. 이제부터 황제 자리의 후계자인 마르쿠스는 헤로데스 아티쿠스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 같은 스승들 밑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수학했다. 그는 145년에 안토니누스의 딸인 파우스티나와 혼인했다.
안토니누스가 161년에 죽은 뒤, 마르쿠스는 루키우스 베루스라는 이름으로 황제 자리에 오른 양형제와 같이 황제가 되었다. 마르쿠스의 치세에, 로마 제국은 막대한 군사 분쟁을 맞이했다. 동방 지역에서, 로마인들은 기세를 회복한 파르티아 제국과 로마에 저항한 아르메니아 왕국 등과 성공적으로 전쟁을 치렀다. 마르쿠스는 마르코만니 전쟁에서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사르마티아족계의 야지게스족을 제압했으나, 이들 및 다른 게르만족들이 로마 제국에 문제의 실체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로마 화폐인 데나리우스의 은 순도를 교정하였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기 마르쿠스 집권기에 커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 상황에서 그의 개입에 대해선 알려진 것은 없다. 안토니누스 역병이 165년이나 166년에 발생하여 로마 제국의 인구를 휩쓸어, 인구 1,000만 명 중에 500만 명의 죽음을 야기하였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169년에 역병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 이전 통치자들과 달리, 마르쿠스는 후계자에 양자를 쓰지 않기로 택하였다. 그의 자녀들에는 베루스와 결혼한 루킬라 그리고, 콤모두스가 있었는데, 마르쿠스 이후 콤모두스의 즉위는 동시대와 현대 역사가들 양쪽에서 논쟁의 대상이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원주와 기마상은 여전히 로마에 서 있으며, 이들 시설들은 마르쿠스의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동시대 전기작가들이 마르쿠스를 칭했던 ‘철학자’가 쓴 《명상록》은 고대 스토아 철학을 오늘날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명상록은 그가 죽고 수 세기 뒤에 작가들, 철학자들, 군주들, 정치인들한테서 극찬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