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이 그로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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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그로미코(러시아어: 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Громы́ко, 벨라루스어: Андрэ́й Андрэ́евіч Грамы́ка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흐라미카, 문화어: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그로믜꼬, 1909년 7월 18일~1989년 7월 22일)는 소련의 정치인이자 외교관이었다. 1957년부터 1985년까지 소련의 외무장관을, 1985년부터 1988년까지는 소련 최고평의회 의장을 지냈다. 1973년부터 1988년까지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일원을 지냈으며, 1956년에는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안드레이 그로미코 Андре́й Громы́ко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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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9년 7월 18일 러시아 제국 (현재의 벨라루스) 호멜 |
사망 | 1989년 7월 2일(1989-07-02)(79세) 소련 모스크바 |
성별 | 남성 |
직업 | 외교관, 정치인 |
배우자 | 리디아 그리네비치 |
정당 | 소련공산당 |
1944년, 미국 주재 소련 대사로서 국제 연합 창설 문제와 관련해 워싱턴에서 열린 덤버턴오크스 회의에서 소련 대표단을 이끌었다. 테헤란 회담 준비, 소련의 크림에서 열린 얄타 회담의 준비 및 개최 (1945년), 포츠담 회담 (1945년)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에는 소련을 대표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 연합 헌장에 서명한 소련 대표단을 이끌었다.
그로미코는 22차례 유엔 총회 세션에 참여하며 소련 대표단을 이끌었는데, 1940년 후반부터 소련의 이익을 수호하려는 목적으로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을 20회 이상 행사하였고, 그 결과 외교 무대에서 "미스터 노"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에는 소련과 미국,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주축 서유럽 국가들 간의 평화로운 관계를 지지했던 그로미코는 소련 정부를 대변하여 군축 분야에서 100개 이상의 이니셔티브를 제안하였다. 소련과 미국의 긴장 관계가 크게 고조되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그로미코가 맡은 역할은 오늘날까지도 역사 논쟁 주제로 남아있다.
1963년, 그로미코는 세 가지 환경에서 핵실험을 금지하는 조약 체결 발의를 제시하였으며, 1966년 1월에는 알렉세이 코시긴과 함께 인도와 파키스탄 간 전쟁을 막는 협상을 벌였다. 또한 그로미코의 참여로 핵확산 금지 조약 (1968년), 소련과 독일연방공화국 간 모스크바 조약 (1970년), 탄도탄요격미사일 시스템 제한에 관한 조약 (1972년), 소련과 미국 간 관계 원칙에 관한 조약 (1972년), 핵전쟁방지조약 (1973년), 전략무기제한 조약 (1972년, 1979년), 유럽안보협력회의 최종 합의 문서 (1975) 채택이 체결되었다.
이와 동시에 그로미코는 1968년,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프라하의 봄의 무력 진압을 지지했으며, 1979년에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결정한 소련의 고위 지도자로 이루어진 협소한 집단의 구성원이었다.
그로미코는 오랜 세월 동안 소련 공산당의 지도자였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아주 가까운 동료였다. 그는 28년 동안 소련의 외무장관을 지냈는데, 이 기록은 소련과 러시아 연방 시대를 통틀어서 깨지고 있지 않다.
1985년 3월 열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의 지도자로 지명되었다.[1]. 그로미코는 1985년 소련의 국가원수인 소련 최고 소비에트 상임의장에 취임하였으며 1988년에 정치 경력을 마쳤다.
그로미코의 모든 외교 활동 표어는 "하루의 전쟁보다 10년의 협상이 낫다" («Лучше 10 лет переговоров, чем один день войны»)였다. 러시아 연방의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는 그로미코는 소비에트 시대의 위대한 외교관이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