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춘계공세
한국전쟁 당시 1951년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공세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중공군 춘계공세 또는 중공군 제5차 공세는 6.25 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이 수행한 군사 작전이다. 작전을 위해 70만 명으로 합산된 3개 야전군을 기동한 중공군 사령부는 1950년 11월부터 12월까지 수행한 제2차 공세 이래로 가장 규모가 큰 공세 작전을 수행했다. 작전은 1951년 여름부터 시작되었고 한반도에서 영원히 유엔군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간략 정보 중공군 춘계 공세, 날짜 ...
중공군 춘계 공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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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일부 | |||||||
춘계공세 당시 격전지였던 가평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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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중화인민공화국 북한 | |||||||
지휘관 | |||||||
매슈 리지웨이 | 펑더화이 | ||||||
군대 | |||||||
제29보병여단 | 제19군집단 | ||||||
병력 | |||||||
418,500[1] |
7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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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불명 | 110,000[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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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세의 첫 공격은 미국 제1군단의 다국적 부대에 맞서는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미국 제1군단은 4월 22일부터 4월 25일까지 발발한 설마리 전투와 가평 전투에서 맹렬히 저항했고 공세의 기동성을 약화시켜 서울 북쪽의 무명 전선에서 공세가 멈추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51년 5월 15일 중공군은 춘계 공세의 2차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동쪽의 국군과 미국 제10군단을 공격하였다. 초기의 공세는 성공적이었지만 그들도 5월 20일이 되자 공세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5월 말 미국 제8군이 반격을 감행하였고 중공군은 이에 큰 손실을 입었다.[5] 그러나 유엔군의 반격도 38도선 인근에서 중공군에 의해 저지됨에 따라 한국 전쟁은 교착전으로 바뀌었고 이러한 전쟁 양상은 1953년 정전 협상 때까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