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레 드 발자크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비평가 (1799–1850)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오노레 드 발자크(프랑스어: Honoré de Balzac)는 1799년 5월 20일 (공화력 7년 목월 1일), 투르에서 오노레 발자크(프랑스어: Honoré Balzac)[참고 1]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1850년 8월 18일, 파리에서 사망한 프랑스의 한 작가이다. 그는 소설가, 극작가, 문예 비평가, 수필가, 언론인, 인쇄업자로서 활동했다. 발자크는 1829년부터 1855년까지 출간된 90편이 넘는 소설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묶은 작품인 《인간 희극》을 남겼다. 그는 《100편의 해학 이야기》를 비롯하여 청년 시절에 필명으로 쓴 소설들과 25편의 완성되지 못한 작품들 역시 창작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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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드 발자크 Honoré de Balzac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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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보 | |
출생 | 투르 |
사망 | 파리 |
국적 | 프랑스 |
언어 | 프랑스어 |
직업 | 소설가, 문학 평론가, 작가, 산문가, 언론인, 미술 평론가, 수필가, 극작가, 발행자 |
학력 | 신 파리 대학교 (1816 - ) 리세 샤를마뉴 (1814 - 1816) 파리 법학부 (1816 - 1819) |
사조 | 사실주의 |
수상 |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1845) |
스승 | 프랑수아 기조, Abel-François Villemain, 빅토르 쿠쟁 |
부모 | 베르나르프랑수아 발자크(부) Anne-Charlotte-Laure Sallambier(모) |
배우자 | 에벨리나 한스카 (1850 - ) |
동거인 | 올랭프 펠리시에 Maria du Fresnay (1833 - ) 카롤린 마르부티 (1833 - 1839) Laure de Berny (1823 - 1833) Claire de Maillé de La Tour-Landry |
자녀 | Marie-Caroline Du Fresnay |
형제 | Laure Surville |
주요 작품 | |
고리오 영감, 인간 희극, 잃어버린 환상, 외제니 그랑데, Splendeurs et misères des courtisanes, 나귀 가죽, Les Chouans | |
영향 | |
영향 받은 인물 | 월터 스콧, 조르주루이 르클레르 드 뷔퐁 |
서명 묘비 | |
묘소 | 페르 라셰즈 묘지 Grave of Balzac and Ewelina Hańska |
발자크는 프랑스 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지의 걸작》과 같은 철학적인 소재를 다룬 소설, 《나귀 가죽》과 같은 판타지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썼다. 그는 특히 《고리오 영감》이나 《외제니 그랑데》에서 볼 수 있는 사실주의 문체에 두각을 보였다.
발자크는 자신이 인간 희극의 서문에서 설명했듯이 뷔퐁이 동물의 종을 식별했던 것처럼 당대 사회의 부류들을 식별하고자 했다. 소설이 '철학적인 가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 월터 스콧의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는 많은 역사가들에게 잊혀진 역사와 그 사회에 관하여 서술하고 민중의 실제 모습과 소설을 겨루며 상이한 사회 계층과 그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을 탐구하고자 했다.
작가는 자본주의의 대두와 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귀족을 흡수한 부르주아지들을 묘사하고 있다. 숙명을 띤 존재에게서 인상을 받은 그는 자연이 창조한 것보다 더 많은 인물들을 창조해냈다 ”발자크가의 모든 것은 문까지도 천재적이다.” (보들레르)
정치에 관한 발자크의 견해는 일관되지 않은 애매한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왕당파로서 그는 7월 왕정에 대하여 강한 지지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반면, 이전에는 자신을 자유주의자라 칭한 적이 있다. 발자크가 쓴 소설에서 노동자들은 주요 등장 인물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발자크는 1840~1848년도 당시 이런 노동자들을 지지했다. 보수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그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정한, 반면 어떤 면에 있어서는 무정부주의자와 반란자들이 관심을 보인 작품을 썼다.
문예 활동 이외에 그는 신문에 기사를 투고하고 훗날 파산하게 되는 두 개의 정기간행물을 성공적으로 편집했다. 작가의 고상한 사명을 확신하던, 사유에 의해 지배당하듯이 살았던 그는 저작권 보장을 위해 싸우고, 문인협회 설립에 이바지했다.
과로로 몸이 약해져 건강이 위태롭던 광적인 작업가였지만, 위험한 투자와 과소비로 인해 여러 거주지에서 가명을 쓰며 채권자들을 피해 살던 발자크. 그는 1850년, 그가 마음에 들어보이고자 17년간 노력한 한스카 공녀와의 결혼 전까지 많은 여성들과의 관계에 있었다. 그가 글을 써가며 번 돈은 부채를 갚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항상 인쇄업 같은 사업을 마음에 두었다. 포르튀네 로(rue Fortunée)에 위치한 궁전에서 그는 엄청난 사치 속에서 엄청난 부채를 안고 사망했다.
전 유럽에서 인정받고 읽힌 발자크의 소설은 당대와 후대의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소설 《감정교육》을 쓸 때 《골짜기의 백합》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라, 《보바리 부인》을 쓴 이는 쓸 때 《서른 살의 여인》에서 영감을 받았다. 광대한 양의 소설 속에서 변모하며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이 인간 희극 내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한다는 점은 에밀 졸라와 마르셀 프루스트에게 큰 영감을 주기도 하였다. 이런 발자크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출판되고 있다. 《계모》는 1906년 영화화되었다. 이후에도 발자크의 수많은 작품들은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각색되며 전 세계에서 새로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