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4세
1285년 ~ 1314년 프랑스 왕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필리프 4세(프랑스어: Philippe IV, 1268년 ~ 1314년 11월 29일)는 1284년부터는 나바라 왕국의 명예왕이며 1285년부터는 프랑스 왕이다. 잘생긴 외모로 인해 미남왕(le Bel, Ederra)[1]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나바라 왕국의 왕 헨리케 1세의 딸 여왕 호아나 1세와 결혼에 의해 상파뉴 왕조의 뒤를 이어 필리페 1세로서 나바라왕(명예왕)을 겸하였다. 부르주아지 내지 소귀족 계급 출신의 법률가를 중용하여, 왕권의 강화에 노력하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나 경제나 정치적인면에서는 종교를 떠나 이해득실에 예민한 인물이었다.
필리프 4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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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왕 | |
재위 | 1285년 10월 5일 – 1314년 11월 29일 |
대관식 | 1286년 1월 6일 랭스 |
전임 | 필리프 3세 |
후임 | 루이 10세 |
나바라 국왕 | |
재위 | 1284년 8월 16일–1305년 4월 4일 |
전임 | 호아나 1세 |
후임 | 루이스 1세 |
신상정보 | |
출생일 | 1268년 4월 |
출생지 | 프랑스 퐁텐블로 |
사망일 | 1314년 11월 29일 (46세) |
사망지 | 프랑스 퐁텐블로 |
가문 | 카페가 |
부친 | 필리프 3세 |
모친 | 이사벨 다라곤 |
배우자 | 호아나 1세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묘소 | 생드니 대성당 |
결코 성군이라 할 수는 없지만 유능한 군주였던것 만큼은 분명하다. 시대적 흐름을 간파하여 붕괴하기 시작한 봉건제의 대안으로 왕 중심의 새로운 국가체제를 확립했고 난제들을 헤쳐나가며 중앙집권을 위한 제도와 기구를 정비하였다. 이를 통해 프랑스가 강대국이 발전할 수 있도록 초석을 닦았으며 당대에도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다. 중앙집권과 왕권강화만큼은 유럽의 군주들중 선두주자에 속했다.
그의 재위기간중에 있었던 유명한 역사적인 사건으로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갈등하며 프랑스 최초에 삼부회를 개최했고, 아나니 사건, 아비뇽 유수, 성전기사단 해체등이 있다. 말년에는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자식대에 가서 후손(손자)을 잇지 못하여 카페왕조가 단절되고 발루아 왕조가 출발하였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에게 왕위계승권을 요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양국간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고 백년전쟁(1337-1453)으로 이어졌다.